고종의 대한제국 - 왜 전제 군주정이었는가(4)

넷. 이 시기와 지금을 단순 비교할 수 있나?


앞서 언급해 온 것은 전제정으로 가지 않을 수 없게 만든 요건들이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전제정이 최악의 정부형태는 아니었다. 만일 전제정으로는 결코 부궁강병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 당시의 통념이었다면, 결국 근대화와 마찬가지로 어쩔 수 없어서라도 입헌군주정이나 공화정으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황제권 중심의 근대화에는 당시를 기준으로 본다면 어떤 의미에서는 입헌 군주국보다 더 장점이 많은 시스템이기도 하였다. 그 이유로는 당시의 급박했던 시대적 상황과 함께 민주성과 효율성의 딜레마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현대적 의미에서 보자면 절대군주정은 받아들일 수 없는 시스템으로, 입헌군주정이나 공화정과는 비교도 될 수 없다. 하지만 당시의 상황은 지금의 인식으로 보는 것과는 문제가 전혀 달랐다.


우선 국민들 사이에서 민주주의라는 것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었고, 이 점에 있어서는 지도부 역시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때문에 지금 생각하는 내각책임제에 기반을 둔 입헌군주정은 당시로서는 실현이 불가능했던 시스템이었다. 최소한 양당제가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입헌 군주정은 황제 독재 대신에 관료 독재를 선택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입헌군주정으로 알려진 일본이 좋은 비교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은 의회가 개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소수의 관료 독재로 진행되었다. 이후에 다시 언급할 세력의 집중의 문제이기도 하였지만, 국정운영의 통일성을 위해서 선택한 것이기도 하였으며, 실질적으로 하원이 작동하기 어려웠던 결과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약점들은 곧 우리의 약점이기도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적 의회제도가 바로 도입되어서 정상작동할 것이라는 것은 지나친 기대였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입헌군주정을 선택한 결과로 인한 이익이 그리 크지 못하다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효율성이 문제가 될 수 있었다. 당시 대한제국은 아관파천과 러일전쟁이라는 거대한 사건들 사이에서 존재하였던 국가였다. 청일 전쟁으로 미루어보아 러일전쟁은 이미 예견되고 있는 상황이었고, 대한제국은 언제 중단될지 모르는 개혁을 한시라도 빨리 진행해야 할 필요를 안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는 일원적인 명령체제가 오히려 효율적일 수 있었다. 실제로 양전지계사업의 경우, 의정부의 토론 끝에 부결된 사안이 고종의 독자적 결정에 의해서 실행된 대표적인 사례이다. 의정부 의제로만 존재하였다면 언제 실행할지 짐작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집권자가 필요하다고 판단된 문제에는 어느정도의 의겸검토만 한 이후에는 즉각 실행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었다. (문제는 고종의 능력이 모든 것을 해결할만큼 특출나지 못하고, 화끈한 결단력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인데... 이건 제도적 문제라기 보다는 고종의 개인적 능력의 한계였다. 만약 이걸 할 수 있었다면, 고종은 그야말로 역사적 영웅급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뭐 결론을 알고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세력과 동의의 문제였다.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점진적 개혁은 극단적인 세력을 제외한다면 광범위하게 수용될 수 있는 접점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이런 수준의 개혁에는 중도의 유생들이나 농민세력들 사이에서도 어느정도 동의가 가능한 문제였던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주체가 문제가 된다. 이 때 광범위한 대상에게서 동의를 받을 수 있는 존재가 또한 군주가 된다는 것은 지금과 당시의 결정적 차이였다. 군주는 기존의 정치적 세력층을 포괄할 수 있는 존재였으며, 동시에 이전까지 이어져온 봉건적 국가의 영향력으로 보수 세력의 일부와 농민층을 포괄할 수 있는 존재였다. 이미 정치적 권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정치적 투쟁을 요구하지 않았다. 하지만 입헌군주정의 경우는 이야기가 달랐다. 일반적으로 입헌 군주정은 군주권을 넘어서는 정치적 군사적 역량을 가진 세력이 우위에서 군주권을 인정, 포괄하면서 형성되게 된다. 이 세력이 시민세력인가, 상공업자들인가로 성격이 달라지기는 하지만 말이다. 예를들어 일본의 경우는 사츠마와 쵸슈라는 강성한 두 번벌을 중심으로 입헌군주정이 형성되었으며, 번벌을 중심으로 의회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그럴만한 독자적 세력이 전무하였다. 독립협회는 세력은 일본의 번벌에 비하여 턱없이 부족하면서, 군주권을 비롯한 기존 세력은 더욱 철저하게 억압하려 하였다는 점에서 중추원 관제가 본격적으로 작동되기 시작한 이후에라도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전제정은 당시 서양 열강을 기준으로 하더라도 드문 형태는 아니었다는 것도 고려대상이 된다. 고종이 황제의 복식을 빌려온 프러이센은 강력한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으며, 근대화의 기원을 프리드리히 2세의 국왕 중심의 개혁에서 찾을 수 있는 대표적 사례였다. 당시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러시아 역시 차르를 중심으로 한 전제군주정을 실시하고 있었으며, 근대화의 시작은 표트르 대제의 개혁으로 소급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입헌마저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지만, 대한제국의 기준으로는 강대국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다른 점에서의 의미부여도 할 수 있는 국가였다. 이 두 국가에 대해서는 일찍이 청의 고문관으로 파견되었던 독일인 뮐렌도르프나, 이후 조러밀약을 시도할 당시의 러시아 공사 웨베르를 통해서, 그리고 아관파천 기간 동안에 충분히 접촉할 여지가 있었던 국가들이었다. 그 외에도 우리가 조약을 맺은 대상국 가운데 어떤 의미에서는 특이한 국가인 이탈리아 역시 군주국이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공화제가 행해진 미국을 비롯한 아메리카 지역의 일부 국가들과 프랑스 등과, 그리고 입헌 군주정이 자리를 잡은 영국 등을 제외한다면 당시의 국가는 모두 군주국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대한국국제에 참여하였던 외국인 고문관들의 법인식과도 맞아떨어지는 것이었기 때문에, 서양식 절대주의에 근거한 법적 이론의 근거를 갖추는 것에도 어려움이 없었다.


이와 같은 점들을 근거로 볼 때, 대한제국이 군주를 중심으로 한 개혁을 선택한 노선은 당시의 시대를 고려한다면 썩 괜찮은 모델이었으며, 일본 메이지 유신의 또 다른 변형이기도 하였다. 물론 최선이었다는 것은 아니다. 가장 좋은 방법으로는 고종을 정점으로 하되, 독립협회나 황성신문, 황국협회 계열들이 자문과 견제 등을 적정한 수준에서 담당해주고, 민권의 가능성을 이어가는 형태였을 것이다. 하지만 대한국국제가 발표된 시기에는 이미 독립협회 세력은 치열한 주도권 다툼 속에서 떨어져 나간 상황에서, 정부 혼자 모든 것을 헤쳐 나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한 견제 세력이 없는 상황에서 일본의 개입을 연상시키며 또한, 다시 갑오개혁 시기로 되돌아가기에 용이할 입헌군주정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였다. 결국 절대적 군주정은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은 될 수 있는, 썩 괜찮을 수도 있었던 방법이었다. 때문에 대한국국제에서 표현된 전제적 군주정이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문제는 이 개혁의 전개에 달려 있었다고 볼 수 있었고, 그 전개 과정에서 아쉬움이 따랐다는 것이 문제였다고 하겠다.

by 발바로사 | 2009/03/16 00:29 | 한국사 | 트랙백 | 덧글(0)

고종의 대한제국 - 왜 전제 군주정이었는가(3)

셋. 의외로 과대포장된 독립협회. 그러나...

  독립협회는 창설주체부터 논란의 여지가 존재한다. 이전까지는 서재필을 필두로 하는 개화파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었다고 이해되어 왔다. 이 경우에는 서재필(더 정확하게는 필립 제이슨이겠지만....필립 제이슨은 5글자이고, 피재손은... 헛갈리니...)이 대한제국 성립 이전에 결성하였던 ‘건양협회’와의 연계를 들어서 설명한 것이 그 예이다. 또한 독립협회 보다 먼저 창간된 독립신문에 서재필이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을 높이 평가한다. 하지만 고종과 대한제국을 강조한 입장에서는 고종이 독립협회 창설의 주체로 이해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여기에는 초기 구성위원의 대부분이 고관직 관료라는 것, 황태자가 하사금 1천원을 내린 것이 초기의 주요 자금이었다는 것 등이 그 근거로 거론된다. 무엇보다도 독립협회는 본래 독립문 건립이라는 제한된 목적을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이 가장 큰 근거 가운데 하나이다. 개인적 판단으로는 실질적으로는 황실 및 국가주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인다. 초기 구성원들의 경우 정부고위관료들로 이루어진 것이 사실이며, 그 중에는 건양협회와는 관련성이 없는 인물들, 즉 이완용, 이윤용, 민상호, 이재연, 현홍택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이 서재필을 중심으로 집합했다고 보기보다는 국가의 개입으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것으로 보인다. 황태자의 하사금 1천원도 단순히 민간단체에 희사한 것으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금액이 많다고 보이는 것도 한 이유이다.

  결성주체가 당시 일정정도 정부에 관여하고 있던 서재필이든, 황실을 중심의 정부 그 자체이든 상관없이 대한제국과 독립협회의 관계는 상당히 우호적이었다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많지 않다. 이 시기의 독립협회는 독립문 건립 자체가 일차적인 주목적이었고, 그것이 달성된 이후 조직의 목표를 계몽활동으로 돌린 다음에도 정부와의 연결고리는 여전하였다. 이와 관련해서 독립신문에서도 대한제국의 성립을 축하하는 기사를 실었으며, 1897년까지의 논설에는 자주국방을 위한 논설이 실리는 것 등이 대표적이었다.(

자주국방(1897년 8월 15일), 해육군 양성을 통한 국토방위(1897년 2월 26일, 1897년 6월 1일), 기기창 등의 보수 확장을 통한 군비의 강화(1897년 8월 12일)와 병력의 확충(1897년 5월 11일), 무관학교 설립(1897년 9월 21일) 등 국방력 강화와 관련된 논설들은 대부분 1897년에 집중적으로 거론되고 있다. 반면에 자주중립외교론과 관련된 사설은 1897년 5월의 논설을 제외한다면, 1898년 3월 이후에 본격적으로 실리고 있다. 독립신문에 실린 내용에 있어서 그 내용은 시기에 따라 상당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시기를 분리해서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 부분이 많다)


  이러한 협력관계는 독립협회가 1898년 2월 20일 청원권 행사를 결의하면서부터 시작된 정치활동에 돌입하면서 갈라지기 시작하였고, 1898년 3월에는 정치적 성향이 보다 노골적으로 표현되었다. 이 시기부터는 회장인 안경수를 비롯하여 정부고관들이 독립협회로부터 이탈하기 시작하였고, 3대 회장에 선출된 이완용마저 지방관으로 파견되어 나가면서 본격적으로 윤치호, 이상재 주도시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만민공동회를 통한 대중운동이 효과를 보면서 독립협회는 점점 세력이 팽창되기 시작하였고, 5월의 서재필 추방(서재필 추방사건 역시 그렇게 독립협회와 고종을 중심으로 한 당시 정부 사이가 벌어지는 것을 보여주는 실마리가 된다. 그리고 독립협회 관련 문건에서는 잘 언급되지 않는 이야기다. 당연하지, 절대 모양새가 좋지 않았는데...)에 대한 항의집회와 7월 중추원을 통한 정치참여를 요구하는 집회, 10월의 연좌죄와 관련된 정부 대신의 탄핵 집회로 진행되어 갔다(이게 또 문제가 되는데... 이 때 연좌죄에 걸린 것이 앞서 언급되었던 다독사건의 주범인 김홍륙이었다는 것이다. 결국, 고종이 이 문제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도 고종은 심기선 등을 일시 파면하는 형태로 문제를 수습하였다. 고종의 입장에서는 또 한 번 넘어가준 것이다).
 

  이러한 독립협회의 요구는 정부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들이 상당수였다. 실질적 내각인 중추원에 나서는 독립협회 임원들이 과반수를 차지해야 한다는 주장과 독립협회의 입장에서 용인할 수 없는 대신들을 파직하라는 주장은 정부권력을 독립협회에서 쥐고 운영하겠다는 주장에 다름 아니었다. 물론 독립협회 입장에서는 본격적인 개혁을 위해서는 이런 주장들이 필요했을 수도 있었다. 점진적 개화론을 보이는 정부측과는 아무래도 이론이 있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들은 노골적인 권력지향성을 해석될 여지가 많았다. 독립협회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농촌지역이 중심이 될 하원을 포기하고 도시민들을 중심으로 한 상원만을 구성하여, 그 상원의 과반수를 독립협회가 차지하겠다는 주장이었기 때문이다.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였던 황국협회의 홍종우가 하원까지 설립할 것을 주장하였던 것을 고려한다면(황국협회는 확실히 고종의 친위세력이기는 하였지만, 민주세력을 때려잡는 백골단의 모습으로만 각인되고 있다는 점은 문제가 있다. 이게 민주화의 과정의 부산물이기는 한데, 도대체 어는 쪽이 주체로서 독립협회를 미화했는지는 영 알 길이 없다. 민주화세력이면 당시 권력이 약했고, 반대 세력은 민주화를 연상시킬 이유가 없기는 하고... 단순히 시대적 반영이라고 해야 하나..), 상하원의 설립문제는 양측의 주도권 다툼의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독립협회는 민중동원을 통해서 이를 강행하였으며, 고종은 어느 정도 수용하는 선에서 조금씩 양보하기도 하고 강경책을 쓰기도 하면서 관계를 조절하였다.

10월에는 이런 갈등이 더욱 심화되어서 독립협회에서는 의회설립 방법까지 직접 만들어 놓은 상태에서 의회개설을 요구하였고 이에 정부가 반대하자, 정부내각 자체를 그들의 요구에 맞는 개화파로 교체시키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것마저도 관철되었고, 고종은 중추원 개설을 허용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정부의 중추원관제가 자문기관에 그칠 뿐 본격적인 의회가 아니라는 점에서 다시 거부, 의회의 권한까지 직접 작성한 상원설립 법안을 조문까지 만들어서 정부에 제출하였다. 이 법안의 한도 내에서는 사소한 수정 외에는 어느 것도 허용되지 않는 시스템이었다. 이것마저도 통과된 결과로 이어진 것이 10월 29일 종로에서 열린 관민공동회였다. 독립협회 측에서도 지나친 선동을 지양하자는 구호가 걸렸고, 정부 측에서도 그야말로 마지막이라는 분위기로 참여한 집회였다. 그 결과 ‘전제황권을 공고히 할 것’이라는 전제가 붙은 ‘헌의 6조’가 건의되었고, 고종은 ‘조칙 5조’를 통해서 이를 받아들이는 형식을 취했다. 여기까지의 과정을 본다면 독립협회는 아무런 권한도 없는 상황에서 민중집회만을 동원한 강행전개였고, 정부에서는 황국협회를 동원한 간접적인 대립을 제외한다면 다소 무리하다 싶은 요청에도 일단 받아들이면서 최악의 상황만은 피해서 진행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결국 설립된 중추원 관제는 독립협회의 요구를 거의 그대로 받아들인 형태였다(차이가 있다면 이전에는 민선의원을 선출하는 민회를 오로지 독립협회에만 고정되어 있었다면, 실제 실행된 안에는 모든 민회로 변경되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다만 당장 다른 자격을 갖춘 민회가 없었기 때문에 독립협회만으로 당분간 한정을 두었다. 이는 정치가 오로지 독립협회만의 독점적 전개로 영구히 지속될 가능성에 대한 예방책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중추원은 대중에게서 선출된 하원도 아니고, 황제에 의해서 임명된 상원도 아니면서 홀로 존재하였다는 점에서 뭐라고 정의하기 어려운 형태의 의회였다. 독립협회 출신만으로 과반수가 구성된 이 기이한 형태의 의회는 권한도 적지 않았다. 근대 민주주의 시스템 아래에서의 모든 의회의 권한을 갖고 있었다. 법률의 제정, 개정, 폐지가 모두 가능했고, 군주가 내리는 칙령의 개정과 폐지 권한도 갖추고 있었다. 의정부의 정책이 황제에게 올라가기 전에는 반드시 중추원을 거치게 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정치의 권한들이 모조리 중추원에 집중되었던 것이다. 중추원이 지속되었다면 결국 모든 권한은 중추원에 집중되게 되어 있었다. 결국 고종은 자신이 가진 모든 권력을 거의 저항도 없이, 대중집회 동원력을 제외한다면 아무런 배경세력도 없는 집단에 넘겨준 세계사에 보기 드문 통치자로 역사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다시 급변하였다.(다시 한 번 말하지만,이렇게 진행된 것이 만일 성공적으로 정착했다면, 이건 전세계 민주주의 역사를 새로 써야할 정도의 사건이 되었을 것이다. 순수하게 시민사회와 집회만으로 국가체제를 뒤엎은 사건이기 때문이다. 명예혁명은 장난도 아니다. 문제는 서울이라는 찻잔 속에서 휘몰고 있는 태풍이었다는 것이지만.... 이 시기 지식층의 민중 불신은 아주 뿌리깊다. 이 장면은 3.1운동까지 이어지고, 그 3.1운동의 열풍이 민중을 중심으로 불어닥친 이후에야 지식인들은 민중을 재인식하게 된다.)

새 중추원관제가 선포된 당일인 11월 4일, 윤치호를 대통령으로 추대한다는 이른바 ‘익명서’가 시내에 붙어버린 것이다. 이에 대해서 윤치호일기와 대한계년사에는 외세와 손을 잡은 친러파 고관들이 꾸민 음모로 기록하고 있다(물론 가능성은 충분하다. 정권의 속성상 이런 형태로의 이양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와 관련된 윤치호일기와 대한계년사를 그대로 믿을 수도 없는 문제이다. 이 두 저서의 저자인 윤치호와 정교가 모두 만민공동회 운동을 이끌던 독립협회의 핵심인물들로, 이 사건의 당사자들이기 때문이다. 부족한 자료를 감안하더라도, 이 상황의 전개에 있어서만은 이 두 자료는 참고의 대상이 될 수는 있어도 절대적 자료가 될 수는 없다. 황현의 매천야록에는 중추원을 설립하려 하였다는 것과, 이후 독립협회가 해산되는 모습 정도만을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때문에 여기서는 기록에 언급된 감정적인 지지여론이나, 외세개입, 수구파 책동 등은 모두 배제하고 사건 전개와 정황만이 고려대상으로 삼겠다). 

  이 사건으로 독립협회는 1차로 해산되고 독립협회의 임원들에 대해서 체포명령이 떨어졌으며, 헌의6조에 대한 조칙 5조도 폐기된다. 이에 대해서 만민공동회가 열리고, 정부에 대한 항의와 지도자 석방운동이 전개된다. 만민공동회의 세력은 점점 확대되었고, 고종은 익명서를 보여주며 군중을 회유하는 한편 결국 여론을 받아들여서 체포된 임원들을 석방한다. 하지만 만민공동회는 여전히 해산되지 않았고, 독립협회 복설과 중추원관제 및 헌의 6조 이행을 요구하였다. 고종은 이에 독립협회에 주었던 민선의원 지분을 배제한 중추원관제(당시 상황에서 정부의 입장으로는 독립협회를 포함한 중추원 관제를 시행한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는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원상태로 복귀시킨다는 것은 그간 있었던 사건들의 모든 책임이 고종과 정부에 있다는 것을 자임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독립협회 임원들에 대한 불신이 강해진 상황이었다)를 제안하였지만, 당연하게 거부당한다. 만민공동회는 종로에서 인화문 앞으로 옮긴 시위를 계속 하였고, 고종이 제안한 ‘제한된 범위의 독립협회 복설’마저 거부하였다. 이후 독립협회와 함께 이미 해산되었던 황립협회 세력이 홍종우의 지휘 아래 독립협회와 충돌하게 된다. 이 두 세력의 충돌은 거의 폭동의 수준으로 번지게 되고, 결국 고종은 최악의 대립 속에서 독립협회 복설을 허락하게 된다. 이후에도 만민공동회는 요구사항을 내걸면서 해산을 미루고 있었고, 고종은 일단 이들의 모든 요구를 받아들인다는 조건하에서 해산을 요구하였다.

결국 만민공동회는 2일 동안 일시 해산을 하였으나 요구사항의 가시적 효과가 약하다는 점에서 다시 집결하였다. 황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사이에 투쟁이 다시 격화될 조짐이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고종은 직접 나서서 사태를 무마하였고, 황국협회를 해산시켰으며, 중추원 편제에 독립협회 계파를 참여시켰다(이 때 비율은 총 50명 가운데 독립협회 계열이 17명, 황국협회 계열이 16명, 황제 임명이 17명이었다. 독립협회의 비율을 과반수까지 인정할 수 없었던 정부와 일단 중추원 개원에 의미를 둔 독립협회의 마지막 타협이었다). 하지만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독립협회는 투쟁중에 죽은 김덕구의 만민장을 통해서 세를 과시하였고, 협상 이후 10일 동안 국정개혁이 약하다는 것을 들어서 다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였다. 이미 중추원이 개설된 상태에서 다시 모인 만민공동회에 대해서 정부관료들도 더 이상은 참지 않았으며, 상황이 프랑스 혁명의 양상으로 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만민공동회는 그동안 꾸준하게 공화제론을 주창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관민공동회 시기에 대중들에게 전달했던 조항의 첫 번째는 ‘황제와 황실에 대한 불경한 언어를 엄금하며,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를 옹호하는 연설을 금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그동안 공화제를 그동안 주창해왔다는 역설적인 증거이며, 익명서가 큰 파급효과를 가질 수 있었던 원인이며, 만민공동회가 연이어 계속 되고 있던 시기에 나왔을 법한 주장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프랑스 대혁명에 대해서는 ‘법국민란’이라 하여 이미 상식 차원에서 알고 있는 상황이었다). 만민공동회는 다시 계속 이어지면서, 황국협회와 관련된 대신들의 파면을 요구하고 있었다.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보이는 모습이 그대로 독립협회에서도 보이고 있다고 보면 된다. 문제는 20세기 말에 보이는 민주화 시위가 그 급한 상황에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서울이라는 국가의 극히 일부에서만. 나머지 국민들은? 갑오개혁 당시 신분제 혁파가 된 이후에도 신분적 관습이 그대로 남아있었던 시기였다. 1회 대통령 선거도 제대로 이해못한 사람이 부지기수였다는 상황에서.... )
 
고종은 이에 윤치호 등을 한성판윤에 임명하는 등의 유화책을 쓰면서, 중추원의 개회를 서둘렀다. (그렇다. 이 중추원은 결국 열린다. 대부분의 경우 중추원이 애초에 설립되지 않았다는 글을 독립협회 관련 단편적 글들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중추원은 실제로 열린다. 하지만 왜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고, 애초에 열지도 못한 것으로 취급되는가? 이유는 뒤에서 다시 언급된다. 아주 가관으로...)

이 중추원의 진행이 결정타가 되었다. 독립협회 출신 의관들의 주장으로 새로운 인재를 대신으로 추천하자는 의제가 제출되었으며, 또 여기서 박영효와 서재필이 언급되기에 이른 것이다. 특히 박영효와 서재필을 대상에 포함시키는데 있어서는 독립협회 출신 임원들에서도 반대의사가 있었지만, 강행되었다. 결국 11명이 최소 8표에서 최대 18표까지를 얻어서 대상이 되었다. 그중에는 각각 10표를 획득한 서재필과 박영효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사건이 결정타가 되었다. 당시 중추원에는 대신 임명권과 추천권이 없었다. 중추원의 첫 의제부터 월권행위가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11명의 대상은 정부 관료 중에서 대신급 임원의 총수에 맞춘 것으로, 최익현 등의 3명을 제외한다면 8명이 개화파 인사로 선택되었다. 최대 득표가 18표인 것을 고려한다면 독립협회 임원들을 제외한다면 참가가 적극적이지 않았거나, 혹은 표가 분산되었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결국 이것은 독립협회가 입법부인 중추원에 이어서, 행정부인 의정부마저 장악하려 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더욱 심각한 문제는 고종에게 추방된 미국인 서재필과 반역혐의로 일본에서 망명중인 박영효가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고종을 다소라도 신경썼다면 결코 나올 수 없는 의결안이었다. 독립협회는 스스로 제출한 중추원 조약을 스스로 깨면서까지 권력장악의 가능성을 보였던 것이다. 이것이 결정타였다.

(그렇다. 중추원에 대한 언급이 나올 수 없는 부분이 이것 때문이다. 이건 애초에 고종과 독립협회가 바라보는 의회의 형태 차이였다. 고종이 바라본 것은 프러시아식 의회제도였다. 국왕은 행정부를 장악하고, 의회가 입법권을 장악하지만, 국왕의 영향력이 다시 입법부까지 미치는 형태를 기대한 것이다. 독립협회의 발상은 영국식, 더 정확하게는 정치 엘리트가 모든 권력을 장악한 일본식이었다. 모든 것은 정치 엘리트가 전개하고, 텐노는 얼굴마담만 하는 형태이다. 이 시기 일본의 내각은 과연 민주주의라 불러야 하는지, 변형된 귀족정이라고 해야 하는지 아슬아슬한 상황이었다. 이 두 형태를 조합한 것이 일종의 이원정부제의 변형인 중추원 설립이었다. 그리고 중추원이 설립되고 열린 바로 그 순간, 중추원은 독립협회가 본래 원한 방향으로 움직일 시도를 한 것이다. 그것도 극단적인 형태로 말이다. 하지만 고종은 구석에 있던 텐노가 아니었고, 무엇보다 독립협회는 무력과 경제력을 장악하고 일본을 장악한 사쓰마-쵸슈의 내각집단과는 달리 가진 것은 서울내부의 지지세력 일부와 혀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전제군주를 건드린 대가는 역사가 증명하게 된다. 그리고 독립협회와 고종이 타협할 여지는 그야말로 하염없이 날아가게 된다. 그러면 이후는 역사가 보여준다.)

고종은 이 단계에서 이미 독립협회와는 같이 갈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상황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직까지도 존속하고 있던 만민공동회에 대해서 해산 권고를 내렸다. 만민공동회 측은 다시 거부하였지만, 박영효 천거와 관련하여 정부의 강경대응이 발표되었고 결국 무력해산으로 진행되었다. 무력 진압 소식이 결정되자 만민공동회 참가 인원은 급감하였다. 여기에 무력진압에 보부상단까지 동원되니 만민공동회는 한순간에 해체되었다. 독립협회의 지지세력은 이처럼 부실했던 것이다. (이게 독립협회의 한계였다. 독립협회가 보여준 민주주의 모습도 그렇게 확실하게 각인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협회 지도부의 판단은 그야말로 그 끝을 알 수 없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 

결국 독립협회 세력은 완전히 무너졌고, 박영효를 천거하는 이들의 필적조사까지 실시되었으며, 독립협회계 중추원 의원들은 전원 면직되었고, 독립협회와 연계를 가지고 있던 대신들은 감봉조치 되었다. 독립협회 임원들은 모두 체포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이후에는 반독립협회 세력들이 정권에 포진되었고, 황국협회의 보부상계열들이 정권에 투입되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윤치호가 체포되지 않고, 관직을 유지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길게 독립협회 문제를 모두 기록한 것은 이 사건이 대한제국이 전제군주정으로 진행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고종의 전제화에 재동을 걸거나 정책운영을 조언하고, 또는 정책에 참여할 수 있는 이들이 급감해버린 것이다. 독립신문보다는 덜 급진적이었던 황성신보 등의 언론들은 살아남았지만, 대한제국시기에 창간되기 시작한 이 신문들은 정부의 허용범위 내에서 움직인 신문들로 외부에서의 견제를 제외한다면 세력화는 엄두도 못내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그렇다. 결국 지나치게 막나갔던 상황은 정확하게 역풍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게 앞서 언급되었던 고종의 정부 불신과 결합되면서 민주주의는 완전히 물건너가게 된다. 그리고 독립협회 세력은 정확하게 반정부 세력이 되었고, 대다수의 세력들이 결국 친일파로 넘어가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으로 넘어간다.)

하지만 이런 전개에는 독립협회의 책임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가시적인 대중적 인기와는 달리 그 기반이 되는 세력은 존재하지 않았던 상황에서, 무모하고도 급진적이며 정부에 대해서 일방적인 요구를 관철하고자 하였던 독립협회의 말기 활동들은 안타깝기에 앞서서 당황스럽기 까지 하다. 특히 박영효 천거와 중추원 장악으로 이어지는 최후기의 상황은 박영효와 안경수 계파의 민중동원이라는 의심을 피하기 어렵다. 단순히 민중들에게 지도부가 끌려다녔다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급진적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국왕권이 엄존할 수밖에는 없는 상황이었지만, 만일 어느 정도 선에서 멈추었다면 대한제국의 전개가 황실 일변도로 진행되었을 가능성은 상당히 낮출 수 있었을 것이며, 개혁과정에서 보다 진보된 민권에 관련된 내용이 첨가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못했다는 것은 이후 광무개혁에서 나타나는 여러 문제점들의 원인이 된다.

by 발바로사 | 2009/03/16 00:26 | 한국사 | 트랙백 | 덧글(0)

고종의 대한제국 - 왜 전제 군주정이었는가(2)

둘. 믿을 놈 하나도 없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은 정국 전개 속에서 고종은 관료나 개화파 등에 대해서 불신감을 쌓아 갔다. 믿을만하다고 생각되었던 인물들은 앞선 전개 과정 와중에 모두 변절하거나 제거되었으며, 3차례의 퇴위 시도와 왕권 약화 과정에서 고종은 측근 세력을 잃어갔다.
 

우선 고종은 혈족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고종의 친정이 부른 문제이기도 하였는데, 대원군과 그 추종세력이 강력한 정적으로 계속 존재했던 것이다. 대원군 추종세력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대원군 복권 운동을 벌였고, 이재선 추대 계획을 꾸몄으며, 농민군과 연계하여 고종 퇴위 계획을 꾸미기도 하였다. 그 결과 대원군이 사망한 상황에서도 고종은 상가를 찾지 않았고, 대한제국 시기동안 고종의 사촌인 이준용은 초기에 함께 하기도 하였으나, 곧 역모와 연루되어서 국외로 망명하는 처지가 되었다. 의화군 이강 역시 이후에는 고종과 뜻을 같이하게 되지만 이 시기에는 당시 일본 망명세력과의 연계가 문제가 되어서 일본과 미국에서 돌아오지 못하는 상황이었다(의화군 문제는 그 성격이 무척 독특하다. 직접 망명자로 거론되지도 않았으며, 의화군이라는 칭호를 받는 것에도 문제가 없었다. 의화군이 귀국하지 않은 것인지, 귀국하지 못한 것인지에 대하여서도 이론의 여지가 존재한다. 일반적으로는 실질적 망명자였다고 보지만, 황태자 문제와 연관되어서 귀국을 방해받았다는 견해가 현재 황실후손들을 중심으로 주장되고 있으므로 확정을 하기 애매한 문제이다.). 처족인 민씨 일가는 국왕의 측근세력으로 존재하기도 하였지만, 친청파로서 원세개와 협력하였던 민영익을 필두로 하여 다양한 성향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절대적 신뢰를 보낼 수 있는 집단은 아니었다. 특히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된 이후에는 접점이 약해져서, 처족이라는 의미보다는 개개인으로 평가해야 할 상황이었다.


고종이 신뢰하였던 인물들이 고종에게 강력한 정적으로 등장한 경우가 많았다는 것도 문제였다.


김홍집은 한미한 집안 출신이었지만, ‘조선책략’을 청에서 가져온 것을 시작으로 외교력에서 인정받았으며 고종의 신뢰도 두터웠던 인물이었다. 개화에 대한 방향에 있어서도 온건개화론의 입장으로 고종과는 접점이 많았다. 하지만 갑오개혁 시기 총리대신으로 전면에 등장하는 과정 속에서 고종에게서 멀어졌고, 결국 역적으로 처형되어 시체마저 돌을 맞게 되는 처지가 되었다. 고종이 김홍집에 대해 가졌던 배신감의 표출이었다.


박영효는 고종이 가장 큰 반감을 보였던 인물 중 하나였다. 갑신정변의 주역으로 일본에 망명했던 박영효는 일본의 영향력이 미쳤던 갑오개혁이 시작되면서 국내로 귀국할 수 있었다. 조선에 보낸 일본의 의도와는 달리 고종과도 어느 정도 관계를 개선하면서 신임을 받았던 박영효였지만, 결국 그의 독자적이고 권력지향적인 정치행보는 일본과 고종 양자의 반감을 모두 사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 상황에서 1895년 7월, 이른바 박영효 반역음모사건이 터졌다. 궁성 호위대를 모두 새로 교체하려한 것이 계기가 되었던 이 사건으로 박영효는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후에도 독립협회 내부의 극단주의자들이 중심이 된 박영효 대신 천거 및 옹립운동과 1900년의 경자모계사건을 필두로 정계복귀를 계속해서 노리게 되었고, 박영효와 관련된 음모론은 대한제국 시기 동안 끊이지 않았다.


대한제국 시기에 대표적으로 문제시 된 인물로는 안경수를 꼽을 수 있다. 안경수는 갑오개혁에도 참여한 인물로, 무엇보다도 춘생문 사건으로 고종의 신임을 얻었던 인물이었다. 을미사변 시기 절박했던 고종에게 미국공사관으로의 탈출을 시도해준 춘생문 사건은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이후 대한제국 시기에 춘생문 사건과 관련된 인물들은 모두 중용되는데, 안경수 역시 마찬가지였다(평소 안경수의 행적은 맹목적일 정도로 일본과 밀착되어 있었기 때문에 왜 안경수가 정동파가 주축이 되었던 춘생문 사건에 가담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춘생문 사건에 참여한 안경수의 행적 자체가 일제의 사주를 받은 것이라는 '학술적' 견해까지 있다). 고종의 신임을 얻은 안경수는 독립협회의 회장을 지낸 것을 비롯하여 고위 관직을 역임하게 된다(안경수가 역임한 관직은 역모사건이 터진 1898년 3월 독립협회 회장직에서 물러난 시기를 기준으로 보아도, 경기관찰사 겸 경기재판소 판사에 임명되었고, 비록 부임한 것 같지는 않지만 4월에는 황해관찰사 겸 황해재판소 판사에 임명되었다).
안경수가 고종과 틀어지게 된 것은 1898년 가을의 고종양위음모사건 때문이었다. 시위대 대대장 이종림, 이남희, 경무사인 김재풍 등을 끌어들인 이 사건은 고종과 가까운 대신들을 동원한 청원, 독립협회 관계자 50명을 입궐을 통한 양위 강요, 군대의 동원이라는 3단계에 걸친 일종의 쿠데타 음모사건이었다(이 사건은 실행도 전에 고변에 의해서 발각되었다. 이 고변의 주체로는 애국청년회라는 유령단체의 이름으로 고변이 들어왔다는 견해와 함께 참여했던 시위대 대대장 이남희의 밀고로 발각되었다는 고종실록의 기록이 있다). 이 사건에 연루되었던 박정양, 민영준 등은 일단 체포 후 석방되었지만, 주모자로 취급된 안경수는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군과 관련된 주요 인물들은 모두 종신형에 처해졌다. 일본 공사관이나 박영효와의 연계마저 거론된 이 사건의 충격과 안경수에 대한 배신감으로 실로 엄청난 것이었고, 그만큼 고종의 분노 또한 한계를 넘어있었다. 여기에 독립협회와의 대립과정 중에서 특히 과격파로 나타난 세력이 박영효, 안경수계와 연계되어 있다는 것이 퍼지면서 고종의 인내력은 한계에 이르렀다(이 과정에서 안경수는 아들에게 서한을 보내서 봉기를 선동하게 하기까지 하였다. 이런 세력들과 독립협회의 연결은 고종이 독립협회에 대해서 근본적인 불신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지금 시점에서 독립협회를 평가하는데 있어서도 다시 생각할 여지를 만믄다). 결국 고종은 일단 공정한 재판을 하겠다는 약속을 하여 귀국시킨 안경수를 체포하여 고문한 다음 이준용 옹립사건을 고변하지 않았다는 이유 등을 들어서 처형해버린다(이 때, 같이 갑오개혁 시기 가담했다가 일본으로 망명한 권형진도 같이 유인되어서 처형되었다. 모진 놈 옆에 있으면 벼락 맞는다의 아주 좋은 실례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국제적 비난을 면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고종은 그것마저도 감수할 정도로 분노하였던 것이다.(이 '유인'은 일본공사의 협조를 받은 후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국제적 비난을 피할 수 없었던 사건이라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황권 전제화로 진행되고 있는 시기에 일본에 대한 자신감의 표출인 동시에 일본의 위신을 떨어뜨리고, 처형의 원인으로 언급된 이준용에 견제의 의미도 담고 있었던 황권 전제화 책략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여기에 더해서 빠트릴 수 없는 것이 일명 다독사건(혹은 독다사건)이다. 앞선 안경수의 강제퇴위음모 사건으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8월 25일, 고종과 황태자가 마시던 커피에 다량의 아편이 들어간 사건이었다. 평소 커피를 즐겨마시던 고종은 이상한 것을 느끼고 곧 마시는 것을 멈추었지만, 무심결에 모두 마신 황태자는 결국 모두 토하고 쓰러져 버린 것이다. 이 사건은 친러파인 고홍륙과 연계된 공홍식의 사주를 받은 김종화의 행각으로 드러났지만, 친러파 또는 러시아 공사관과의 연계설이 돌았고 동시에 일본공사관과 연계되어 있다는 설도 있었다. 이 사건은 고종에게 극도의 불신 증세를 가져왔으며, 특히 모든 조선인을 불신하여 결재를 받아야할 대신들마저도 고종을 만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하였다. 이 사건은 친일파는 물론이고 친러파마저도 불신의 대상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고종에게 정치적 연계라는 방법에 있어서 소극적일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특히 문제가 되었던 인물들이 대부분 개화파 인사들이었으며, 그들의 상당수는 여전히 국외에 망명한 상태로 존재하면서 국내와의 연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문제들이 집합적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다음에 언급할 독립협회와의 대립이었다.

by 발바로사 | 2009/03/15 23:35 | 한국사 | 트랙백 | 덧글(0)

고종의 대한제국 - 왜 전제 군주정이었는가(1)

하나. 계속된 왕권 약화에 대한 반발


우선 고종의 입장에서 보자면, 친정 이후 왕권에 대한 계속된 제약과 약화에 대한 반발이 가장 먼저 거론될 수 있을 것이다. 고종에 대해서 권력지상주의자라는 비판이 많은데, 왜 고종이 권력을 강하게 추구하게 되었는가를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고종이 어린 나이에 집권하게 되면서, 조선 역사상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살아있는 대원군이 정치의 정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고종에게 대원군은 부친이자 강력한 왕권이라는 의미를 교육시킨 인물이기도 하였지만, 다시 언급하겠지만 강력한 정적이기도 하였다. 성년이 되고도 한참이 넘도록 고종은 친정을 시작할 수 없었다. 비록 친정이 행해진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대원군 지지세력에 비하여 준비가 부족하였던 고종 친정 세력은 여전히 대원군 복원운동에 시달려야 했다. 대원군 세력을 어느 정도 몰아낸 이후에는 어느 정도 처족의 세력이 강해지기는 하였지만, 국왕주도하에 정치체제에 대한 수정과 자강의 가능성을 엿보기 시작하였다. (명성황후를 중점으로 하는 민씨일족이 국정을 좌지우지했다는 견해도 있어왔다. 하지만 중심을 잡을만한 거물급 고관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명성황후는 정국의 주도세력으로 급부상하기에는 시간적 여력이나 시대적 상황에서 부족함이 많았고, 때문에 명성황후가 중간에서 민씨일족의 균형을 어느 정도 잡아 줄 수는 있었을지 몰라도, 국정운영을 독주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았다. 결국 명성황후는 프랑스 혁명시기 마리 앙투아네트를 연상시키게 되고, 고종은 루이 16세를 연상시키는 인물로 형성되고 있는데.... 명성황후는 을미사변으로 오히려 이미지 반전이 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고종이 더 동네북이 되는 상황으로 이어진다. 이는 이승만의 영향이 상당히 강하다고 보이는데... 이는 뒤에 언급되는 독립협회와 관련되어서 더욱 강한 의심을 주게 된다. )

하지만 이때부터 외세가 본격적으로 문제가 되기 시작하였다. 개화에 대한 필요성과 대원군 세력과의 차별성 부각을 위해서라도 맺어야 했던 강화도 조약을 시작으로 한 개항은 그에 대한 반대여론을 조성했다. 그중 가장 먼저 터진 것이 임오군란이었고, 이후 청은 뮐렌도르프와 마건상을 고문관으로 임명하면서 내정간섭을 시작하였다. 청국의 간섭을 벗어나기 위해서 러시아와 연계를 꾀하자, 원세개는 고종퇴위음모로 맞섰다. 대원군 지지파에 이은 두 번째 고종 퇴위 시도였다. 이후 갑신정변을 거치면서 일본까지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외세 개입의 혼란 속에서 강력한 왕권을 유지된다는 것은 무리였다. 이런 상황에 결정타를 찍은 것이 갑오농민전쟁이었다. 이전에는 민병익 등이 당시 조정의 반발여론을 무릅쓰고 청국에 출병을 요청하였다는 것이 통설이었지만, 원세개로 대표된 청국의 강압으로 인하여 출병하게 되었다는 전혀 다른 견해가 제기되었다. 기존 질서의 유지를 위하여 청군의 출병이 강제되었다는 견해는 텐진 조약 이후 어차피 한번은 청일간에 전쟁이 치러질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라는 점에서라도 개연성이 높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국왕권이 점점 뒤로 밀려난다는 이야기였고, 정부 관료들도 친청, 친일 등으로의 분리가 가속화되었다. 더구나 농민군은 대원군과 연계가 존재하였다(대원군은 밀서를 통해서 ‘고종을 상왕으로 올리고 왕비와 왕세자를 폐위한 다음 대원군의 다른 자손으로 하여금 왕위를 대신하게 하겠다’는 의사를 표현하였다. 이미 1881년 이재선을 옹립하고자 하였던 안기영, 권정호 등의 1차 퇴위음모에 이은 두 번째 대원군계의 고종 퇴위 시도였다). 3번째 국왕 퇴위 시도였다.

그리고 청일전쟁 직전인 1894년 6월, 일본군은 경복궁을 점거하고 국왕 등을 연금하였으며, 기존에 존재하던 교정청을 철폐하고 민씨일족 등을 모두 배제한 군국기무처를 설치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청일 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난 것은 국왕권 약화의 결정타가 되었다. 일본의 영향력 아래에서 실시된 갑오개혁은 고종에게는 무엇보다도 국왕권에 대한 제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우선 이미 갑신정변 등의 문제로 국외로 떠났던 서광범, 박영효 등이 일본의 개입과 함께 하나 둘 복귀하기 시작하였으며, 홍범 14조는 국왕권의 약화에 그 내용이 집중되어 있었다. 형식적으로는 지위가 ‘대군주폐하’로 높아졌지만, 왕실사무와 국가사무가 분리되었고, 왕실재정도 분리되어 나왔으며, 실질적 정치는 친일관료들이 포진된 내각에서 진행되었다. 갑오개혁은 진행기간 동안에 그 주도적 집단이 외부적 요인에 의해서 계속 바뀌었지만, 국왕권이 계속 약화 일로였다는 점에는 변화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 변화가 온 것은 다시 외부적 요인이었다. 삼국간섭으로 인하여 일본의 입지가 약해지고, 대신 이미 연계를 시도하였던 러시아의 세력이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고종은 이전까지 갑오개혁을 주도하였던 김홍집을 파면하였고, 1895년 5월 17일, 갑오개혁의 무효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일본주도로 진행된 개혁에 대한 반발과 그 와중에 축소된 군주권을 회복하기 위한 시도였다. 그러나 이 상황은 오래가지 않았다. 8월 20일 을미사변이 일어나면서, 고종은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갑오개혁을 무효화했던 고종의 조치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총리대신 김홍집을 필두로 하여 조회연, 정병하, 유길준 등이 주축이 된 친일 내각이 국정을 완전히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고종은 완전히 정치에서 밀려나게 되었으며, 무엇보다도 신변의 위기까지 느끼는 상황이 되었다. 이후 춘생문 사건이 일어났지만, 결국 실패로 끝나면서 고종은 더더욱 철저하게 고립되었다. 이런 상황을 일거에 뒤집은 것이 아관파천이었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하자 말자, 가장 먼저 김홍집 등을 역적으로 규정하고 체포, 처형하게 한 것은 이런 전개의 결과였다. 이후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의 방 한 개에 더부살이하는 기간을 거쳐서, 결국 경운궁으로 환궁하게 된다.


이처럼 고종은 대원군 섭정기를 간신히 극복하고 겨우 친정 체제가 갖추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연이은 왕권의 축소를 겪어야 했다. 강력한 왕권을 주창한 대원군 섭정기간 동안에 왕권에 대한 인식이 자랐을 고종이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자신의 의사가 배제된 상황에서의 왕권 약화는 개화의 필요성과는 또 다른 문제로 다가왔을 것이다. 특히 간신히 왕권을 회복했다가 생각했을 시점에서 일어난 을미사변은 왕권뿐만이 아니라 생명까지 위협한 사건이었다. 때문에 고종에게 왕권은 피동적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일 뿐만이 아니라, 다시 을미사변을 겪지 않기 위해서라도 쉽게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다.

by 발바로사 | 2009/03/15 23:32 | 한국사 | 트랙백 | 덧글(0)

고종의 대한제국 - 왜 전제 군주정이었는가(0)

 

대한제국시기 고종이 반포한 ‘대한국국제’는 대한제국의 성격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만세불변할 전제정치’를 주창한 대한국국제는 이제껏 대한제국 비판의 근간에 있었다. 왕권을 제약하고 민권을 신장하는 것이 근대적 민주화의 진행과정이라고 본다면, 그 내용면에서 이전의 갑오개혁보다 오히려 퇴보하였다는 비판이 존재하였다. 이러한 비판은 ‘헌의6조’를 통한 입헌군주정을 주장하고, ‘민권론’을 통해서 공화정까지 염두에 두었다고 평가받는 독립협회의 활동과 비견되어서, 외세와 결합한 친러 수구세력이 중심이 되어 독립협회를 강제 해산시킨 보수반동적 행동으로 평가받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왜 고종은 전제군주정으로 진행했을까라는 것이 우선적 문제가 된다. 이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이유가 거론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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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의 대한제국이 왜 전제국이 되었는지, 광무개혁이 어떤 내용이 었는지에 대해서 썼던 레포트에 잡설을 약간씩 더해서 써본다. 전에 N포탈의 블로그에 올렸던 적도 있지만, 현정부와 관련되니 그곳에 도저히 내버려둘 엄두가 나지 않아서 얼음집으로 이사. 이걸 시작으로 올려본다.

하지만 이 글에 있어서 배경이 되었으면 하는 것은,
1.개인적으로 고종을 비롯한 황식 복원에는 크게 관심도 없고, 왕실에 목매고 있다거나 하는 것을 결코 아니며
(현재 정치 꼴을 보면 입헌 군주정 처럼 뭔가 중재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이건 상원을 만든다거나 하는 방법도 있고,
무엇보다 그 왕실도 개판이 되면 ... 답이 없지...)

2.독립협회가 상당히 과대평가 받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확실하게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배경이 이승만에 있다는 의심을 하고 있다.
1.이승만이 독립협회에 참여해서 박영효 옹립세력에 참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독립협회에 참여했던 민주투사 이승만의 진실이 이것이다.
2. 그리고 박영효 옹립음모 등으로 이승만은 반역죄로 사형선고까지 받았다. 물론 실제로 죽지는 않았고 그래도 배경이 있다고 선교사 불러서 영어 수업도 받고, 책까지 쓰기는 했지만 말이다.
여하튼 이런 저런 사정 이후 자신은 왕실의 후예를 자랑했던 '프린스 리' 리승만은 결국 건국후 구 왕실을 싹 정리해버린다.
이 두가지를 조합한다면 답은 사실상 나왔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싶다. 단순한 음모론일까? 아닐 것 같은데...

by 발바로사 | 2009/03/15 23:30 | 한국사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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